『모멘트』 더글라스 케네디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이미 『빅픽처』, 『위험한 관계』를 읽은 상태였고, 특히, 『빅픽처』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탄탄한 구성능력 등에 대해서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위험한 관계』 또한 나쁘지 않았지만 난 대체적으로 미친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취향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모멘트』라는 소설은 나에게 정말 어찌 표현하기도 힘든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주었다.

주인공인 토마스가 베를린에서온 소포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공감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럽기도 한 냉전시대의 이야기를 더글라스 케네디는 참 잘도 풀어나간다. 그렇다. 냉전시대의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하면 냉전시대 스파이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통일이 머지 않은 독일에서 미국남자 토마스와 동독여자 페트라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난 영화 리뷰와는 다르게 책 리뷰에서는 스포일러에 대한 부담감 없이 내용을 종종 공개하기도 하는데, 이 책은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라는 주인공에 엄청난 수준의 감정이입이 되어 버렸는데, 그래서 그가 배신감을 느끼는 순간 나 또한 배신감을 느꼈고, 마지막까지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랄 때는 나 또한 그러길 바랬다. 그리고, 페트라의 편지를 읽으면서 토마스가 느끼고 있는 그 죄책감, 그 또한 공유했다. 토마스가 한 짓을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죄책감과 자괴감 등의 감정이 솟구쳐 오르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마 토마스보다 내가 더 많이 울었던 것같다. 내가 워낙에 남자치곤 잘 우는 편인지라...

감정적으로 안정이 된 후 가져본 궁금중 중에 하나는 과연 여성 독자들은 분명 토마스 보다는 페트라에게 감정이입이 되었을텐데,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내심 궁금하다. 아무래도 토마스의 입장에서 반전이 일어 나는데, 페트라에 감정이 이입된다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감정일지...

한국에서는 마케팅 때문인지 몰라도 더글라스 케네디 작품 중에 『빅픽처』가 가장 유명하지만 난 『모멘트』가 더 잘 씌여진 소설이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5년동안 내가 읽었던 소설 중 이렇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소설은 없었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