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끝』 아서 클라크

장르소설을 터부시하는 가풍때문에 난 많은 장르소설을 접해보지는 못했다. 또한 이런 습관이 몸에 베어 스스로도 장르소설을 읽기 꺼려지는 심리상태가 남아 있다. 특히나 무협소설이 그러한데, 무협영화를 좋아하고 종종 즐기곤 함에도 불구하고 책이라는 미디어로는 접하기가 왠지 꺼려진다. 그나마 톨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영화로 개봉을 한 이후에는 환타지 장르에 대한 이러한 터부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얼마전에 민웅이형의 언급으로 류츠신의 작품인 『삼체』를 읽음으로써, SF에 대한 터부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거의 매일 방문하다시피 하는 아톰비트님의 블로그에서 유년기의 끝이라는 TV시리즈가 방영되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바로 이 이야기의 원작소설이 아서 클라크Sir Arthur Charles Clarke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급작스레 궁금증이 생겨 도서관에서 해당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아톰비트님의 해당 글은 아래 주소:
http://atombit.net/220579236482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르소설을 지양해왔던 독서 습관으로 인하여 아서 클라크가 SF장르에서 3대 메이저 작가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고, 작품 해설에 따르면, 그의 작품들 속에서 외계인은 후반기 작품으로 갈수록 점점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책을 읽어 가면서 난 두 가지 다른 작품을 떠올렸는데, 우선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그것 중 하나이다. 신인류가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집단적인 사고를 하면서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에반게리온에서 서로의 AT필드가 해제되는 모습이, 그리고 젠이 마지막에 혼자 인류에 남는 모습 또한 에반게리온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책 뒤편에 나와 있는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정말로 에반게리온은 『유년기의 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책이 꽤나 오래전에 씌여 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1953년에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

인류가 신인류를 출산한다는 점에서 약 2년전에 읽었던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인 『제노사이드』도 연상되었다. 아마도 다카노 가즈아키도 『유년기의 끝』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제노사이드』는 나에게 신인류와 현생인류의 관계나 신인류 자체의 존재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만든 작품이라 아마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책이었는데, 내가 SF물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더라면 『유년기의 끝』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희극인지 비극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현생인류의 멸종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현생인류가 잉태한 신인류에 의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진화이든 돌연변이이든 인류의 유산이 승계된 것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존재가 영화에서 다루어질 때 주로 적대적이었던 반면에 『유년기의 끝』에서는 외계인이 인류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진보된 문명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류 친화적이며, 인류에 대한 목적성을 가지고 지구를 방문한다. 물론, 우주로의 웅비에 대한 원천적인 봉쇄라는 족쇄가 채워진 상태이긴 하지만, 그들이 가져다준 지구의 평화적인 상황은 꽤나 낭만적이다.

아서 클라크의 다른 소설을 읽어볼 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듯하며 같은 클리셰가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화로도 유명한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한 번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것이 그의 원작소설인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