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난 주에 읽었던 『남아 있는 나날』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소설이었기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또 다른 작품인 『파묻힌 거인』의 첫장을 넘길 때의 기대치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꽤 재미있다. 역시, 난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죽어 나가는 소설에 흥미를 느끼는 것같다.

굳이 『파묻힌 거인』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아마도 환타지 소설에 들어갈 것이다. 고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듯이 브리튼족과 섹슨족의 대립을 그리고 있으며, 아서왕의 전설이 엮여 있고, 도깨비와 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환타지적 요소는 그저 망각이라는 거대한 설정을 위해 존재하는 장치적인 요소일 뿐 본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즉, 용감한 기사가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는 스타일의 이야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지난 번 『나를 보내지 마』는 SF 장르에 속하지만, 실제로 읽어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는데, 이번 『파묻힌 거인』도 환타지 장르임에도 전혀 환타지 같은 느낌이 아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독특한 능력인 듯하다.

『파묻힌 거인』의 본질은 아마도 기억와 망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늘 기억력의 한계를 아쉬워하곤 하지만, 망각이야말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기억이라는 것이 항상 행복한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삶은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게 마련이고, 그 슬픔에 대한 기억이 망각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면 아마도 삶은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과거를 행복이라는 물감으로 덧칠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면서 느꼈던 기대감이 『남아 있는 나날』로 인하여 반감되던 찰라, 다시 『파묻힌 거인』으로 회복되었다고나 할까,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는 나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을 듯하다. 그의 작품들은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마법이 걸려 있는 것같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