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차 동원훈련기 - 세째날

드디어 동원훈련의 마지막날이다. 이제는 같은 생활관(내무반) 아저씨들과 친해져서 서로 뜨거운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친해져서 쓰잘데기 없는 수다로 시간을 다 보내버린 것이 아까워 이번 동원훈련에는 책한권을 다 읽겠다는 의지를 품고 들어 왔는데, 가지고온 책이 소설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분량이라 목표달성에는 실패할 듯 하다.

오전에는 각 보직에 대한 훈련이 있었는데, 나는 운좋게도 행정병으로 분류되어 식당에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보직을 부여받은 아저씨들이 연병장 뙤악볕을 받으며 앉아 있는 것과 비교하면 꽤나 재수가 좋은 편이다. 행정 등의 교육을 담당한 여교관은 우리의 절대무반응에 힘겨워하며 대답 좀 하라고 다그쳤으나 우리 아저씨들은 그 말조차 그냥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버렸다. 나중에는 그 교관이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 교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작년에 만난 수다가 좀 되는 예비군 아저씨가 하나 있어서 둘이서 교육을 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작년에 잔돈이 없어 고생했던 경험을 상기하여 이번에는 동전을 좀 가져오겠다고 다짐했건만 또 잊어버리고 지갑을 열어봐도 어찌 천원짜리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결국 어제 아침에는 생활관 내 옆자리 아저씨에게 200원을 빌려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커피 생각이 나는데 또 그 아저씨에게 빌리기도 뭐해서 그냥 참고 있다가 교육듣는 동안 옆 아저씨가 그래도 나이도 있어 보여서 커피나 한잔 뽑아달라 청했더니 기꺼이 뽑아준다. 그 아저씨 담배피고 난 커피마시면서 부동산 투자에 대한 열띤 강의를 들었다. 용산은 이미 올랐고, 이제 서울에서 개발 안된 곳은 여기 내곡동 뿐이란다. 그린벨트도 풀렸으니 잘 생각해 보란다. 근데, 이 군사지역은 어찌하나...

점심식사 후에는 개인 군용물품 반납 시간이 있었고, 여기저기 생활관을 옮겨다닌 나로서는 혹시나 분실했다고 물어달랠까봐 좀 걱정을 했는데, 조교들이 알아서 잘 처리를 해 주었다.

점심식사 후에 완전군장으로 야산을 탄다는 뒤숭숭한 이야기가 있었으나 단독군장으로 연병장에 잠시 사열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퇴소식만 하면 된다. 그런데, 퇴소식 중 사건이 생겨 버렸다. 헌병대대장인지 사단장인지가 우리의 퇴소식 태도가 안좋다며 훈시를 매우 거칠게 하더니 끝내 마지막 순간에 경례를 똑바로 안한 한 예비군 아저씨를 상황실로 데리고 오라는 말과 함께 퇴소식을 다시 하라고 행패를 부렸다. 예비군들 여기 저기서 불만의 소근거림이 들리고 한 경상도 출신 예비군 아저씨는 만용을 부리며 이렇게 외쳤다. "대대장님 돌아오세요!" 이 아저씨도 함께 상황실로 끌려 갔다. 경례만 다시 하는 선에서 끝나 퇴소식을 다시 하는 일은 없었지만 대대장은 화를 내며 현역들을 모두 데리고 퇴장해 버리는 추태를 반복하였다. 4년차 예비군 아저씨의 말로는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도 좀 심하긴 심했다고 했는데 비교적 앞쪽 중간에 서있어서 그런지 뒤에서 누가 뭘 심하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제는 그들이 다 아무 언질도 없이 퇴장해 버리는 바람에 입소시에 맡겼던 주민등록증과 실비조로 제공되는 만원정도의 현금을 못받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가버리면 나중에 동사무소로 보내지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4년차 어떤 아저씨의 말이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생활반 한 아저씨의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 아저씨의 차키가 가장 중요했다. 결국에는 5시 가까운 시각에 주민증과 현금을 돌려 받고 퇴소를 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늦게 끝난 관계로 엄청나게 막히는 서울 강남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고속터미널 인근에 내려서 도봉동 한신아파트 사는 아저씨들끼리 지하철을 타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세 명이서 택시를 타기로 하였으나 교통상황이 도와주지 않아 쪽팔림을 무릅쓰고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집에 오니 8시다. 정말 엉망진창인 동원훈련이었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