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코 프리미어 SNQ001J, 30대의 시작을 축하하며...

휴대폰이 시계를 대체한 지도 꽤나 오랜 세월이 흐른 2009년을 살아 가고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도 나는 시간을 볼 때는 휴대폰을 꺼내기 보다는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난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 축에 속한다. 하지만, 내 돈주고 시계를 사본 적은 없다. 시계만큼 다양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제품도 드물고 흔하게 선물받을 수 있는 아이템 중에 하나이기에 언제나 시계는 있었다. 게다가, 내가 시계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냥 이쁘고 시간만 잘 가면 된다라는 것이 나의 시계에 대한 정의였고 그런 정의를 만족시켜주는 시계는 세상에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예전에 이런 광고 멘트가 있지 않았던가! "차는 모른다. 운전은 한다."
비슷했다. "시계는 모른다. 시계는 차고 다닌다."

기존에 차고 있던 시계는 야후 로고가 멋스럽게 박혀 있었던 생산 브랜드를 알 수 없는 패션 시계였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야후!코리아에서 버그파인더로 활동하면서 마지막에 선물받은 시계였던데 독특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5년동안 아무 불만없이 녀석을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30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도 나이로써 30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직장에서는 잠재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나이이고, 집에서는 부양가족의 한명이 아니라 적어도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친목모임에서는 천방지축 이미지를 버리고 뭔가 의젓함을 보여야 하는 나이다.

이런 와중에 얼마 전부터 시계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브랜드와 기능 등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험난했던 20대를 끝내고 더 험난해질 30대의 시작을 축하, 아니 위로하기 위한 보상차원에서 결정된 나의 최종 선택은 세이코 프리미어 SNQ001J가 되었다.

SNQ001J를 선택하게 된 과정

충동구매와는 거리가 먼 내 소비행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애 최초로 구매하는 시계에 대하여 다방면의 고려가 없을 수 없기에 꽤나 여러 조건에 대하여 따지고 또 따져 보았다.

  1. 쿼츠(Quarts)여야 한다, 밥주는 시계를 지양한다
    시계의 가장 핵심 부품인 무브먼트는 쿼츠와 기계식으로 나뉘는데 기계식은 다시 Self-Winding machanical과 Automatic Machanical로 나뉜다. 흔히들 오토매틱이라 함은 바로 Automatic machanical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서 쿼츠는 건전지로 가는 시계이고 오토매틱은 (흔들든 돌리든) 밥주는 시계이다.

    키보드 앞에서 지속적으로 혹사당해야 하는 나의 손목에 걸맞는 시계로써, 비싸고 예민하여 시간도 잘 안맞지만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기계식은 이미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아니었고 두 종류의 장점만을 뽑아서 만든 세이코의 독자 기술인 키네틱 무브먼트도 결국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2. 가격은 130만원 이하여야 한다
    생뚱한 숫자인 130이라 함은 최근 급격하게 상승해버린 환율을 고려해서 나온 $1,000를 의미하는 숫자이다. 워낙에 시계의 종류도 다양하고 그 만큼이나 가격도 몇 천원부터 몇 십억까지 분포되어 있기에 어디까지가 검소한 시계고 어디까지가 사치인 시계라고 정의하기도 힘들지만,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임의대로 $1,000가 넘어가는 시계를 사치품으로 분류하였다. 쿼츠 무브먼트 시계를 그 이상 주고 사는 것 또한 조금 엉뚱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이상의 가격은 나의 현금 유동성에 꽤나 데미지를 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되었다.

  3. 패션브랜드 vs 시계전문브랜드
    시계 라인업을 갖춘 브랜드를 나눌 수 있는 명확한 조건 중에 하나가 그 브랜드가 패션브랜드이냐 시계전문브랜드이냐이다. 아무래도 시계전문브랜드가 더 우월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외에 딱히 패션브랜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엔지니어의 본능이 시계전문브랜드로 나를 인도하였고 그 중 최초로 쿼츠 무브먼트를 양산하여 수많은 스위스의 시계회사들을 파산시겼다는 역사적 사실의 주인공인 세이코에 끌리기 시작하였다.

    추가적으로, DC인사이드의 시계갤을 여러번 들락날락 하다보니 패션브랜드는 쓰레기, 시계전문브랜드는 개념시계라는 인식이 세뇌되어 버렸다. 사실, 쿼츠시계를 사는데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닌데, 왠지 시갤러들에게 낚여 버린 기분이 들기도 하고...


  4. 복잡한 것은 싫다
    24시간을 표시해주는 시계의 주 목적을 살짝 넘어서서 날짜를 표기해주는 기능, 거기다가 크로노그라프 기능을 넣어 정밀한 시간을 재는 기능까지 아날로그 시계에도 참 많은 기능들이 들어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딱 시간과 날짜까지였다. 요즘 인기있는 크로노그라프 기능은 시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시계 본래의 목적인 몇 시이냐를 보는데 시인성에서 방해가 되며 주관적이지만 심미성도 떨어 뜨린다.

  5. 30대초반에 어울리는 시계
    좀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명분을 위하여 세이코의 보급형 브랜드인 알바(Alba)도 알아 보았지만, 개성있는 디자인은 많아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찾기는 어려웠고 결론적으로 30대가 차기에는 그 철학(?)의 괴리가 컸다.

이렇게 하여 결정된 것이 SNQ001J이다. 물론,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깔을 가진 SNQ003J나 SNQ004J 등도 함께 고려하였지만 다수가 하얀색이 가장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던 반면에 검은색인 SNQ003J는 시인성에서 비판이 있었고 SNQ004J는 탑골삘(?)이라는 비판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착용샷, 그리고 시계줄 줄이기 에피소드

내 손목은 남자치고는 꽤나 가는 편이다. 콤플렉스까지는 아니지만 굵고 힘줄이 툭툭 튀어나온 손목을 보면 종종 질투심이 유발되기는 한다. 그래서 시계의 선택시에도 큰 시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 때는 객기로 자그마한 여자 시계를 차고 다닐 때도 있었다. SNQ001J는 알이 최근 경향과 비교해서 작은 편(37mm)이기에 이러한 걱정은 덜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SNQ001J의 작은 판을 오히려 단점으로 지적하기도 하는데, 원래 드레스 워치로 태어난 녀석이라 적절한 지적은 아니다.

어째거나 작은 알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시계줄을 제공했기 때문에 시계줄을 줄일 필요가 있었는데, 동네 시계방에 가자니 괜시리 기스나 만들까봐 걱정되었고 예지동같은 시계전문 아케이드를 찾아 가려니 귀찮아서 그냥 집에서 혼자 해결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시계 처음 산 녀석치고는 꽤나 대담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여러 가지 방법이 나와 있었는데, 이 시계에 맞는 방법은 송곳 등으로 박힌 심을 빼내는 것이었다. 집에 안경 등을 고치는 세밀한 드라이버가 있었는데, 드라이버가 휘어질 정도로 힘을 주어도 심들이 잘 안빠져서 당혹했고 힘겹게 빼내면 심대신에 드라이버가 구멍에 박혀서 드라이버 빼내는데 또 한나절이었다. 힘겹게 밤세며 시계줄을 줄이며 한 숨을 돌렸다. 무려 네 개의 블록을 빼야 내 손목에 맞았다.

문제는 심을 다시 박아 연결해 놓은 시계줄이 그냥 스르르 빠진 다는 사실이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시계줄이 끊어져 있다. 인터넷을 다시 찾아보니 시계줄을 다시 사라는 말밖에 없지 않은가! 갑자기 막 화가 나기 시작하였으나 마음을 추스려 고민고민 하다가 심을 약간 구부려서 집어 넣으니 문제는 해결 되었다. 이틀정도 차고 다녔으나 안전하게 손목에 잘 붙어 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착용샷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Tissot PRC200 Gent 검은색 판 모델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아... 지름신, 이제 그마~안!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