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동안 간직했던 019-221-6169, 포기했다

1998년 수능시험이 끝난 겨울 어느날 용산역에서 선인상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어느 노점(?)에서 개통을 하면서 난 이동통신 시대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0년도 넘은 기간동안 내 번호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 019-221-6169였다. 10년 반도 훌쩍 지나는 세월동안, 강산도 변하는데 내 번호는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고등학교 친구들 일부는 아직도 이 번호를 휴대폰 단축번호가 아닌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있을게다.

두달 전 난 신규로 새 번호를 얻게 되면서 이 번호를 정지시켜 놓았다. 그리고 오늘 결국 이 번호를 해지하고 왔다. 10년넘게 함께한 번호인데 해지는 정말 순식간에 되더라. 011같은 프리미엄 번호도 아닌데도 그 동안의 정이 들어서인지 꽤나 섭섭하다. 아직도 새번호 보다는 구번호가 더 익숙하고, 가끔은 전화번호를 기입해야 할 때 구번호를 적었다가 줄을 긋고 새 번호를 넣곤 한다.

버려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정부의 정책이었다. 모든 이동통신을 010으로 통합하려는 정부의 정책은 결국 대부분의 사용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일부 011이나 SKT로 넘어간 017같은 프리미엄 앞자리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버티고는 있으나 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에이징 등의 편법을 이용해서 몇 년 더 버티는 것이 나에게 얼마만큼 유의미한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본 끝에, 결국은 포기로 마음을 정했다.

생각해보면 전화번호라는 것은 단지 숫자의 조합에 불과하다. 010이라는 것은 이 번호가 이동통신임을 의미하고 그 다음 네 자리는 통신사에 할당된 번호이며, 나머지 네 자리는 사용자들의 선택번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번호와 번호의 주인을 연관지어 생각하곤 하며 또한 번호의 주인은 번호를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휴대폰이라는 기계가 단순히 전화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정도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아이템으로 인식되듯 우리는 번호따위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번호를 버리니 아쉬운 것들, 곤란한 것들, 좋은 것들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 정들었던 무형자산이기에 그리고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에 그 아쉬움이 첫째요, 두번째는 연결이 끊어 졌던 지인들 중 일부는 이 번호로 연락을 하여 다시 그 연결고리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감의 상실이다.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이기에 한 번 마음을 열었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희미해져 가는 건 참 견디기가 힘들다.

곤란한 일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처리(?)였다. 저장된 번호 중에는 전화번호가 변경되었다고 말하기엔 일방적인 관계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번호들도 있었다. 과감하게 연락을 포기하는데 꽤나 큰 결심이 필요했다. 알고 지낸 한 누나에게는 망설임 끝에 문자를 보내지 않고 싸이월드 미니홈피 방명록에 번호가 바뀌었다고 글을 남겼더니 자신의 번호도 바뀌었다며 먼저 연락하지 못함을 미안해 했다. 그냥 문자로 보냈으면 끊어 졌을 수도 있었을 인연이다. 이렇듯 그동안 그냥 쌓여 있었던 인연에 대한 재정립은 좀 냉정해야할 필요가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곤란한 것 같다. 인간관계에 대한 클래스를 나누는 것 같아 살짝 역겨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좋은 것들도 있다. 일단, 대학교 졸업앨범을 보고 연락하던 결혼정보 회사들의 전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잡코리아에 올라온 내 새로운 연락처를 보고 연락을 하더라. 그래도 기타 스펨전화나 문자들도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2년마다 새로운 번호로 바꾸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또 한가지 좋은 점은 그 동안 소원했던 인연들에게 연락할 핑계꺼리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사실, 오래간만에 연락을 해오는 연락들은 그다지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다. 보험을 하나 들라던지, 1년만에 전화해서 결혼한다며 결혼식 참석을 부탁하던지 하는 일이 대다수다. 하기사, 1년넘게 연락 안했던 지인에게 연락을 하는 것은 꽤나 큰 동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일이 아니라도 연락을 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난 정성스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받는이의 이름을 넣어가며 문자를 보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번호변경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20대와의 작별, 30대의 시작

이번에 버려진 019-221-6169가 나의 20대를 상징해 주는 번호였다라며 그 의미를 축소시킴과 동시에, 새 번호는 나에게 30대의 시작을 알리는 번호라는 상징성을 부여해 주고 싶다. 너무 지나친가? ㅋㅋㅋ

인생을 살아 가면서 사야할 것도 많지만 버려야 할 것도 많다는 것을 느낀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꽤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기에 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나는 아직 그 풍요로움을 누리기 보단 쓸데 없는 것에 정을 쏟고 있었나 보다. 이제 나도 버림의 미학에 익숙해 지련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