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31

『차브』 오언 존스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기나긴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영국, 그래서, 난 영국의 정치는 꽤나 이상적인 수준일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언 존스가 쓴 『차브』라는 책을 읽은 후,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한 국가에서는 비교적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가 작동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평소에 종종 들르는 Economic View라는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이 2015년에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책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 http://economicview.net/14439 )을 포스팅 했는데, 그 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차브』였다. 평소에 정치적으로 나보다는 비교적 왼쪽에 서있는 분이라 과연 나에게도 이 책이 재미있을까라는 약간의 우려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난 이 책을 영국 정치의 현주소를 이해하고 싶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서인지, 내용이 실제로 영국의 노동계층을 대변하는 어조로 씌여졌음에도 거슬리지는 않았다.

영국은 겉으로는 그저 입헌군주제를 선택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계급사회이다. 얼마간 여행자로서 영국에 머무른다면 그저 비싼 물가에 혀를 내두르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1년이상 영국에 체류한 사람들은 확실히 그 점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최근에 이런 계급사회에서 혐오와 공포, 그리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계급을 뜻하는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 차브이다.

차브Chavs란 간단히 이해하자면 빈민계층 또는 노동계층의 젊은 세대를 의미한다. 2015년에 한국에서 개봉했던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라는 영화에서 에그시Eggsy가 바로 차브를 대변하는 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영국 정치계에서는 이런 차브들을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포장하여 이런 시류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의 표를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심지어 노동당Labor party 마저 이런 하류층을 대변하지 못한지가 꽤 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이런 시류에 동의하는 유권자 층은 자신들을 중간계층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국내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단어에 더 친숙할텐데, 책에서는 굳이 중간계층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여기까지는 그냥 그렇구나하고 책장을 넘겼다. 내가 국내 빈민층의 삶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데, 영국 빈민층이 어떻게 살든 그것이 뭐 그리 감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런데, 그 이후는 매우 흥미로웠다. 일반적으로 노동계층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주었으나 더이상 그러하지 못한 노동당을 여전히 차악을 선택한다는 의미로써 표를 주거나, 아예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의사를 표출했는데, 최근에는 그들이 극보수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당에 투표를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즉, 유입되는 이민자들이 영국 백인 노동계층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면서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 색체를 드러내는 보수 민족주의 정당이 힘을 얻고 있다는 뜻이다.

난 가난한 자들은 자연스레 공산주의에 빠진다는 생각을 해왔다. 실제로 미국이 한국전쟁 후 우리를 도와준 것은 우리가 가난해지면 남한도 공산화될 것이라는 우려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던 상식과는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니... 아마도 국가 전체의 빈곤은 공산화의 우려가 있지만, 특정 계층의 빈곤은 극보수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을 해본다. 내가 정치쪽에 전문지식이 없다보니, 정확한 이해를 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노동계층의 일자리를 이민자들이 빼앗고 있다라는 프레임은 감정적으로 꽤나 효과가 크다. 실제로 난 몇년 전에 중국인 컴퓨터프로그래머가 물밀듯 밀려와 한국인 컴퓨터프로그래머들의 자리를 빼앗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물며 특별한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은 어떻겠는가!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실제로 노동계층이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서술한다. 이민자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상황보다는 아예 일자리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이민자가 영국 백인 노동계층의 일자리를 빼앗는 경우는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문제들의 시발점으로 대처리즘Thatcherism을 지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보수언론들의 스마트한 노력때문인지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를 영국병을 고친 당찬 여성으로 조명하고 있는 듯하지만, 영국 노동계층들은 이 여자를 거의 악마의 화신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는 그녀가 당시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던 탄광촌 광부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떻게 효과적으로 노조를 붕괴시켰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의 정치는 분명 일제치하의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을 겪고 게다가 군부독재의 시대까지 경험했던 국내의 정치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친일논란과 매카시즘, 그리고 군부독재의 아픔을 그저 과거의 상처로 느낄만큼 시간이 흐른다면, 국내 정치도 영국 정치와 비슷한 모양새로 흘러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국판 차브들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한국판 차브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도, 한국정치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참고자료이다.

by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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