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

좀 웃기는 이유이긴 하지만, 친숙해지기 어려울 정도로 기나긴 제목때문에 그냥 지나칠까 고민했던 애니메이션이 바로 이번에 이야기할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이다. 일본판 원제도 매우 길어서 일본에서 조차 약어인 사요아사さよ朝라고 줄여서 부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느꼈던 감동을 생각하면 정말 좋은 작품을 놓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몇몇 장수마을로 대표되는 곳이 있지만, 이 사요아사의 세계관에서 가장 장수를 하는 민족은 요르프이다. 100년이 넘느냐 마냐가 아니라 몇 백년을 살아간다. 게다가, 나이를 먹어서도 청소년기인 15~20세 사이의 외모를 유지한다. 오래 사는 것보다 더 부러운 것이 바로 이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부러운 민족이다.

인간이 갈망하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요르프족이지만, 그들대로 긴 인생을 삶으로 인하여 겪는 고초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수많은 이별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생이별이 아니라 사별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조금이나마 이러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장수와 안티에이징의 두가지 이점에 비해서 그저 이별을 경험해야 한다는 단점은 너무나 시덥지 않은 단점인 듯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좀 더 현실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그들의 장수능력을 갈망하는 다른 종족이 그들의 피를 노리고 있다. 하늘을 나는 용과 같은 종족인 레나토를 조련하여 전쟁에 사용해온 메자테 왕국이 그들 중 하나인 레일리아를 납치하여 왕자와 혼인을 시킨다. 그 난리중에 주인공인 마키아는 폭주하는 레나토에 얼떨결에 매달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고, 거기서 죽은 엄마의 품에서 울고 있던 인간의 아기를 발견하고는 대신 엄마가 되어 주기로 하고 아리엘이라는 이름도 지어 준다.

이렇게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다. 영생과 모성애. 관객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영생이지만,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모성애이다. 처음 주위 사람들은 마키아와 아리엘을 모자 관계로 인식하지만, 아리엘이 성장하고 마키아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남매지간으로 행세하기 시작한다. 아리엘은 흔히 보여주는 남자아이의 성장 과정을 밟아 가는데, 즉, 엄마의 품이 좋지만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야 하는 아들의 숙명 또한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늙지 않는 엄마의 모습은 그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모성애라는 측면에서 레일리아와 마키아는 조금 다르다. 그들 모두 결국 자식들과 거리를 두게 되지만,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좀 다르다. 그리고, 다른 요르프족과는 달리 마키아가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는 이별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 이별이 꼭 외로움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꿋꿋한 마키아와는 다르게 관객들은 이런 이별을 받아들이기 참 힘들다.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살아가는 마키아와 아리엘의 이별 장면은 더욱 그러하다.

참 슬픈 이야기다. 극장을 나온 후 검색을 해보니 감독인 오카다 마리는 작품을 지나치게 신파극으로 몰아 간다며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감독이라고 한다. 이번 작품도 그러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신파를 잘 만드는 것도 능력이 아닐까 한다. 코미디언은 어떻게 관객들을 웃길까 아이디어를 짜내고 짜낸다. 그러한 노력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듯이, 어떻게든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할까 노력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작화는 참 예쁘다. 청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주인공들도 예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그들의 있지 말았어야 할 공간들 또한 아름답게 채색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3D 애니메이션이 대세가 되어 버린 세상이지만, 일본의 2D 애니메이션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3D 애니메이션이 담지 못하는 디테일 때문일 것이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