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물도

대표적인 집돌이인 내가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냥 서울에 있었더라면 정말 그러했겠지만, 거제도로 일하러 내려오게 되면서 언제 또 거제도를 오게 되겠냐며 내려온 김에 거제도 곳곳을 둘러 보자는 적극성이 생겼고, 그래서 거제도의 괜찮은 명소는 거의 다 둘러보게 된 상황이라 조금 더 멀리 통영쪽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소매물도가 볼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배편을 알아보던 중, 엇? 거제에서 가는 것이 더 가깝네?

그러했다. 통영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보다 거제 저구항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이 훨씬 더 가깝고 배삯도 적게 들었다. 그래서, 시간에 맞춰 아침일찍 서둘러 시내버스를 타고 저구항에 다다랐다. 아마도 거제도 주민 빼고 나만큼 거제도 시내버스를 타고 이렇게 여행을 잘 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내버스 타보면 로컬이 아닌 승객이 나밖에 없는 경우도 많고, 어떤 때는 로컬들도 없이 혼자서 시내버스를 타고 오는 적도 많다.

참고로, 시내버스로 거제도 여행을 다니는 것은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닌데, 버스 인터벌이 2시간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중간에 버스 기다리느라 낭비되는 시간이 많다. 나같은 경우는 설렁설렁 다녀도 상관없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이지, 2박 3일 빡빡하게 움직여야 할 때는 자차를 이용하거나 차를 렌트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인터벌이 2시간인 저구행 버스 때문에 꽤나 일찍 저구항에 도착해보니, 사람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썰렁하다. 11시 유람선인데 9시도 안되어 도착한 상태라 아침식사라도 할 겸 유람선 터미널 2층에 위치한 터미널분식이라는 곳에 들러 해물라면을 한 그릇 먹었다. 라면이 이렇게 시원한 맛을 낼 수도 있구나 싶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해물라면 한 그릇 추천한다.

11시가 되어 유람선을 탔다. 이미 외도갈 때 유람선에서 바닷바람 쐬는 건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냥 배 내부 좌석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을 선택하였다. 유람선이 출항하면 갈매기들이 따라와 새우깡을 얻어 먹곤 하는데, 저구항에서 매물도로 가는 항로 초반은 특히나 그런 경향이 심하여 따로 갈매기존이라고 불리운다. 확실히 외도 갈 때보다 유람선과 같은 속도로 크루징 하며 새우깡을 받아 먹는 갈매기들의 수가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갈매기의 주식은 새우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갈매기존을 지나면 다소 지루한 바닷길이 이어진다. 가는 길에 장사도나 가왕도 등을 지나게 되지만, 그저 섬일 뿐 딱히 흥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주말 치곤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바람에 꾸벅꾸벅 졸다보니 매물도에 도착했다. 소매물도 티켓을 끊어도 매물도의 두 항구에 잠시 들렀다 소매물도로 가게 된다. 소매물도 직항은 없다.

다시 10여분 지나니 드디어 소매물도에 도착했다. 섬 안에서 숙박을 할 수 없는 외도와는 달리 소매물도는 펜션들이 해변을 향에 우후죽순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쓰윽 훓어 보고 길에 칠해진 파란 라인을 따라 트래킹을 시작하였다. 한 100미터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한쪽은 등대섬까지 2.3km라고 씌여져 있고, 한쪽은 0.5km라고 씌여져 있다. 이것이 등대섬까지인지 아니면 두 길이 만날 때까지인 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과감히 2.3km 코스를 선택했다. 가깝다는 것은 산을 가파르게 올라야 한다는 뜻이고 멀다는 것은 편안하게 둘러서 간다는 뜻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제대로 틀리고 말았다.

2.3km 코스를 택한 보상
굳이 2.3km 코스를 선택하지 않아도 경치 좋은 스팟은 많으니, 그냥 0.5km 코스를 추천한다

2.3km 코스를 선택함으로 인하여 얻는 잇점은 둘러서 가파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해안가를 걸으면서 경치를 좀 더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꽤나 훌륭한 경관이 펼쳐진다. 탁 트인 바닷가를 다소 높은 각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은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이점은 곧 사라지고, 잘 관리되지 않은 산악로가 펼쳐졌다. 절대 편한 길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걸으니 독사 출몰지역이라는 경고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긴장하고 조금 더 가니 다시금 독사 출몰지역이라는 경고 표지판이 보였다. 인적도 드물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쪄서 맹독을 품고 있는 가을 독사에게 물려 섬에서 객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어디서 들었더라, 큰 소리를 내고 걸으면 뱀이 미리 피한다고. 일부러 걸음을 거칠게 하여 소리를 내어 보기도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을 듯하다.

조금 더 두려움에 떨고 나니 다른 등반객들도 보이고 조금 더 가니 0.5km 코스와 만나게 되었다. 산의 정상까지는 좀 더 올라가야 한다. 바닷가 가을산은 추울 것같아 패딩까지 입고 왔는데, 오히려 반팔을 입고올 걸 그랬다. 평소에 안하던 등산이라는 걸 하다보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반팔차림이다. 혼자 미련해 보일 것 같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본 등대와 등대로 가는 길
저 길은 걷는 것보다는 이렇게 위에서 바라보는 편이 더 낫다

정상에서 보는 소매물도 주변의 바다는 정말 감동적이다. 카메라를 꺼내 셔터질을 해본다. 대충 보이는 섬 하나 걸쳐서 찍으면 엽서에나 나올 듯한 멋진 사진이 만들어 진다. 게다가 섬이 없는 망망대해는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마치 (다른 나라도 아니고) 다른 행성에 홀로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소매물도의 트래킹 코스는 정상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반대쪽에 있는 등대섬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힘겹게 올라왔던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내려 가는 길도 상당히 가파르다. 잘 정리되어 있는 길임에도 등산에 익숙치 않은 나에겐 쉽지 않다. 힘겹게 내려오니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다는 그 등대섬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물 때를 잘 만나 펼쳐진, 등대로 가는 길
아마 제한적 단절성 때문에 이 길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게다

모랫길이 아니라 자갈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흔히 알고 있는 자갈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자갈이다. 아니, 몽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을 것같다. 이런 돌들로 길이 만들어져 있다. 반대편에 등대가 도전정신에 기름을 붓고 있다. 보통 여기까지 보고 다시 등대섬까지 가는 사람과 돌아가는 사람으로 나뉘어지곤 하는 듯하다. 힘겹게 산을 타고 내려왔는데, 다시 만만치 않은 언덕이 기다리고 있으면 포기할 법도 하다. 또한, 물 때를 잘 만나지 못하면 건너가보고 싶어도 건너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나같은 경우는 미리 물 때를 알아보고 11시 배를 탔기 때문에 건너갔다 돌아올 시간은 넉넉했다. 그래서 도전해 보기로 한다.

한 20분쯤 열심히 언덕을 오르니 등대에 도착했다. 딱히 뭔가 엄청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하얀 등대가 서 있을 뿐이다. 등대를 빼면 더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건너 와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 사람들이 등산을 하는지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좀 오르다 정상을 남기고 그냥 내려오면 뭔가 찜찜하고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그렇게 정상까지 오르는 것같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주말마다 산을 타게 되는 것이리라! 물론, 내가 그러한 습관을 들일 생각은 없다. 굳이 저렴한 성취감에 취할 생각은 없다.

셀피는 쉽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더 쉽지 않다

등대에 올라가니 등대가 해를 가려주어 눈부시지 않고 역광도 아닌 스팟이 있다. 다들 거기서 사진을 찍길래 기다렸다 셀피를 남겨 본다. 지난 외도에서도 찍긴 하였는데,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공개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어, 어제 집에서 표정 연습을 해 보았는데, 역시 셀피를 밥먹듯이 찍는 20대 여자애들같이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기는 어렵다. 그래도 힘겹게 여기까지 올라 왔으니 사진 한 장 남겨야 할 것같은 의무감에 어색한 표정의 이 사진을 한 장 올려 본다.

등대는 늘 좋은 피사체이다
하늘과 바다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등대의 모습을 돌아 보니 꽤나 그럴듯 했다. 이 등대를 배경으로 내 사진을 한 장 더 남겨볼까 했으나 역광이라 포기했다. 이 등대는 배경보다는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2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저구항으로 돌아가는 2시 30분 배가 있음에도 기어이 4시 15분 배를 예약했는데, 그냥 2시 30분 배를 타도 충분했을 시간이었다. 하이힐을 신은 여성, 뭐 이런 케이스가 아니라면 충분히 갔다올 수 있는 시간이다. 표 받을 때 변경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매표소 아줌마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항구 근처에 세워진 푸드트럭에서 핫도그 하나와 레몬에이드 한잔을 사들고 근처에 대충 만들어 놓은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바닷가를 바라보다 4시 15분 배를 타고 저구항으로 돌아 왔다. 그렇게 통영 여행인지 거제 여행인지 애매한 소매물도 여행은 끝이 났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저구항 너머로 지고 있는 해가 너무나 멋져 황급히 카메라를 꺼내 셔터질을 해본다. 이제까지의 거제여행에서는 동쪽에 바다가 있었기에 해질녘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지만 저구항은 서쪽에 바다를 두고 있으니 해가 지는 모습이 제대로다. 장엄한듯 쓸쓸하다. 저구항의 해지는 모습은 어쩌면 소매물도에서 본 경치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소매물도 여행 만큼이나 기억에 남을 해질녘
장엄한듯 쓸쓸하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