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WH-H900N

헤드폰을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하기에, 그저 5만원 안팎의 헤드폰을 사용하면서도 그럭저럭 만족해 왔는데, 거제도 생활이 이어지면서 헤드폰을 사용할 일이 드라마틱하게 많아진 상황이다. 집에서는 꽤나 우람한 스피커와 외장 DAC로 PC-Fi를 즐기곤 하였으나, 거제도 숙소에서 스피커까지 구비하긴 부담스러워 좀 진지하게 음악이나 영화를 볼 때는 헤드폰을 이용하게 되고, 한달에 두번 서울로 올라가는 길, 내려가는 길에 시외버스에서도 헤드폰으로 영상을 시청하곤 한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헤드폰의 쿠션이 너덜너덜하여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오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새로운 헤드폰 장만을 고려하고 있는 상황, 갑자기 고객사에서 소니 매니아를 자처하는 태윤씨가 소니 1000X 헤드폰으로 시감을 해준다. 이렇게 해서 노이즈캔슬링의 세계를 처음으로 접해 보았다.

처음부터 비싼 헤드폰을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버스 안에서 걸리적거리는 유선을 제거하고자 블루투스 기능의 헤드폰을 알아 보니 10만원대 초반 정도가 필요했고, 여기에 그럭저럭 효과적인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들어가니 10만원대 후반에서 20만원대 초반까지 가격이 올라갔다. 게다가, iPhone을 사용하니 AAC를 지원하는 헤드폰으로... 결국은 소니 WH-H900N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WH-H900N이라는 어마무시한 녀석이 내 손에 들어 오게 되었다.

5만원짜리 헤드폰을 사용해오다 20만원이 훌쩍 넘어 가는 헤드폰을 구입한다는 사실에 손이 잘 나가지 않았지만, 더 저렴한 헤드폰 찾는다고 소모하는 시간이 총 20시간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자, 그냥 빨리 사버리는 것이 인건비를 감안하면 이익이라는 생각과 객지에서 고생하는데 이 정도의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심리가 지배를 하기 시작하면서 결정을 내려 버렸고, 막상 구입해서 사용해보니 길고 길었던 고민의 과정이 참으로 부질없이 느껴질 정도의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듣고 있었던 것인가!

무선헤드폰, 즉, 블루투스 헤드폰을 사용하면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이 바로 음질 저하라고 해서 상당히 우려를 하였는데, WH-H900N은 오히려 블루투스로 연결하는 것이 스테레오잭에 연결하는 것보다 음질이 더 좋았다. 블루투스는 iPhone이나 iPad로 연결을 하여 인코딩을 다시할 필요가 없는 AAC 코덱으로 인코딩된 음원을 들었기 때문이고, 스테리오잭을 이용한 것은 PC에서였는데, 외장 DAC가 없는 상태에서 내장 사운드카드는 충분한 수준의 음질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테레오잭에 연결해도 기존 5만원짜리 헤드폰 보다는 음질이 더 좋았지만, 헤드폰에 내장된 DAC를 이용한 것에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소니 WH-H900N의 DAC 성능은 탁월한 수준이었다.

예전에 조그마한 PC스피커를 사용하다가 외장 DAC에 덩치가 있는 스피커를 연결하여 들으면서 음질의 차이가 생각보다 충격적으로 커서 놀랐던 경험이 있는데, 그 당시만큼의 차이가 느껴졌다. 예를들면,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기존 헤드폰에서는 마치 기계음과 같은 건조한 소리가 나는 반면, WH-H900N의 DAC를 통해서 들으니 울림이 제대로 느껴진다.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데, 뭉개져서 그냥 지나치곤 하던 몇몇 악기 소리가 모두 선명하게 제대로 들린다. 물론, 헤드폰의 한계로 스테이징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현재 출시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소니 1000XM3, 보스 QC35 정도라고 할 수 있을텐데, WH-H900N은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어서 성능이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노이즈캔슬링 수준 역시 만족할만 하다. 두 가지 상황에서 테스트를 했는데, 우선, 세탁기를 돌리면서 헤드폰을 착용하고 음악을 들어 보았더니, 세탁기가 지금 탈수를 하고 있긴 하는구나정도만 알 수 있는 수준으로 세탁기 소음을 제거해 주었다. 서울 올라오는 길에 고속버스에서도 테스트를 해보았는데 완전히 나만의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역시 버스안에 있구나정도만 인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버스 소음이 제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다음과 같이 단계별로 적용할 수 있다:
Noise Canceling
Wind Noise Reduction
Ambient Sound
Off

이 단계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헤드폰 좌측에 있는 물리적 버튼을 누르는 방법이 있고, 연결된 iPhone에서 앱을 이용하여 조절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 단계 중 "Wind Noise Reduction" 단계는 앱을 통해서만 적용이 되는 점이 좀 아쉽다. 굳이 최대치로 적용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던 것은 가끔 최고 단계인 Noise Canceling 단계를 적용하면 노이즈 캔슬링에 실패했기 때문인지 지직거리는 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다. 서울에서 거제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직거림에 시달리다가 "Wind Noise Reduction" 단계로 낮춘 후에 이러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이즈캔슬링 때문에 귀가 먹먹하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고, 심지어 노이즈캔슬링을 켠 경우와 끈 경우의 음질 차이도 적으며, 그 차이가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저 다름으로 느껴질 정도라 WH-H900N의 노이즈캔슬링 성능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다만, 1000XM3의 노이즈캔슬링 성능은 정말 어느 정도일 지 궁금할 따름이다. 광고에 보면 아이유가 공사장에서 혼자 1000XM3를 착용하고 자신만의 세상을 느끼는 듯한 장면이 있던데 과연 그 정도일 지...

WH-H900N의 단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고, 내 사용환경에서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PC와의 블루투스 연결문제이다. iPhone, iPad, 2013년형 Gram에서는 모두 블루투스 연결이 원활하게 되는데, 최근에 조립한 데스크탑 PC에서는 블루투스 연결이 실패하거나 연결하더라도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잦은 끊김이 발생했다. 이것이 사용하고 있는 무선 키보드와의 혼선 때문인지, PC에 내장된 블루투스가 안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헤드폰 고장 안내고 한 5년만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통 헤드폰이 고장나는 것은 스테레오선 단선이 가장 많은데, 블루투스니 그러한 리스크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과연 배터리가 잘 버텨주냐가 문제인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5년은 좀 욕심인 것 같다. 몇 년 지나면 노이즈캔슬링 기술이 좀 더 보편화 되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이 정도 수준의 헤드폰을 구입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