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보

어렷을 적에 집에 디즈니 명작 동화라는 시리즈북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아기코끼리 덤보였다. 당시에는 덤보보다는 담보라고 불리웠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였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고 그저 귀가 엄청나게 커서 날 수 있는 코끼리였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이야기가 실사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극장을 찾았다.

극장에 들어 서면서도 기대치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이미 동심을 거의 상실한 탓인지 최근 정통 디즈니 작품들을 보면서 크게 감동을 받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대치를 높여 주는 것은 그나마 내가 좋아하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내가 좋아라 하는 에바 그린Eva Green이 출연한다는 점 정도였다. 영화가 시작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감독이 팀 버튼Tim Burton이고 뭔가 감독의 스타일을 물씬 풍길 여건이 될 것같은 서커스단 이야기라는 점은 기대치를 다소나마 높일 수 있는 요인이었다.

초반부는 생각보다 우울하다. 전형적인 어린이용 영화라고 하기엔 덤보와 이 녀석의 어미가 겪어야할 고난과 숙명적인 불행은 서커스단의 재정이 쪼그라 드는 것과 궤를 같이 하며 극장 전체를 침울하게 만든다. 어린이 관객을 찾아 보기는 어려웠지만 아마도 있었다면 극장안이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같다. 게다가 에바 그린이 연기한 콜레트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엄청난 서커스단 사장의 여자 친구지만 그 반대편에는 어둠이 자리잡고 있다. 그저 관객들의 구경거리라는 측면에선 덤보와 다를 바가 없다.

시련이 깊을 수록 감동의 깊이도 커진다고 했던가! 초반부의 지나친 어두운 분위기는 아마도 반전을 좀 더 극적으로 선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싶다. 초반에는 디즈니 역사상 가장 슬프다고 알려진 인어공주만큼이나 우울했지만 결말이 그 정도로 우울하진 않다. 어쩌면 이렇게 우울하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역시 디즈니에서 그럴 리는 없다.

어렷을 적이 추억이 깃든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되어 즐거웠다. 예매 실수로 바로 전에 영화 티켓 한 장을 날려 먹어서 거의 두 배를 주고 본 영화라 본전 생각이 날 만도 한데 영화가 만족스러워 다행이다. 또 한가지, 에바 그린이 정말 예쁘게 나온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스크린에서 본 그녀의 캐릭터 중에 가장 착한 것같다. ㅎㅎㅎ;;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