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2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양승훈

공적자금을 투입한다고 했을 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왜 혈세를 망한 기업에 들이 붓느냐며 정부를 비판하는 쪽이었던 내가 10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거제도에 내려가서 그 국민의 혈세로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짧게 나마 조선소에서 일해본 입장에서 등장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는 흥미로워 보일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계속 기회만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게 된다.

책의 내용은 실제 내가 조선소에서 근무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과 상당히 일치했다. 물론, 실제로 내가 배를 만드는 야드에서 일하지는 않아서 사실 여부를 세밀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그러하다. 세계적인 조선 경기의 붐과 함께 두 조선소가 위치해 있는 거제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돈이 도는 동네였다. 그러다 조선 경기의 급격한 위축과 함께 지역 경제마저 파탄이 나버리고, 살리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기업과 근로자와 근로자 가족들의 목숨을 정부 정책기관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물론,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타이밍에서는 LNG선 쪽 주문이 제법 들어와서 경기가 살아 나는 인상을 받긴 했다. 게다가 울산의 다른 조선소와 합병을 하는 이벤트까지...

조선소에서 근무할 때, (금전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외부 직원이라고 홀대를 받은 경험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객지에 와서 고생이 많다며 사소한 편의를 제공받기도 했고, 대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그럼에도 거제도에서의 삶이나 조선소 안에서의 생활이 녹녹치 않았던 것은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난 아침에 단체로 국민체조를 하고 모두가 같은 회사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상황이 매우 숨막혔다. 심지어, 퇴근을 해도 같은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며 동네 마트나 편의점에 보이는 광경은 나에게 거제를 낯선 도시로 머무르게 만들었다. 물론, 다소간의 시간이 흐른 후, 편의 측면에서 내가 체조를 하거나 그 작업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 열외될 수 있었지만, 눈치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서울 출신 엔지니어들의 부적응도 비슷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주말 저녁에 있는 서울행 셔틀버스는 꽤나 인기가 넘친다. 거제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오지 않고 주말 부부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조선소는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려 하지만, 우수한 인재는 거제도에 내려가는 것을 주저한다. 일본의 조선업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한국 조선소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중국 조선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느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근무할 때는 잘 인지하지 못했던 점을 이 책을 보고 상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거제도의 클래식한 중산층 가족의 모습이다. 지금은 대부분 결혼을 해도 맞벌이는 하는 추세지만, 거제도는 여전히 남자 외벌이가 많다. 조선소의 급여가 중산층 4인 가족을 먹여살리기에 여전히 충분한 경향도 있고, 반면에 여성들의 일자리가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거제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부부들은 결혼하자마자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 내에서 가장의 권위가 여전하다고.

지역 경제 이야기 중에는 옥포의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내가 경험했던 옥포는 을씨년스러운 이태원같은 느낌이었다. 나름 맛집도 거제의 다른 곳보다 많았고 내가 거주했던 아주동에서 비교적 가까워 삶이 너무 지루해지면 옥포에 가서 약간의 활력을 얻어 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옥포가 잘나갈 땐 이태원 못지 않았던가 보다. 외국인 선주사 직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살다 보니 꽤나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경험했던 옥포에서 을씨년스러움을 빼면 그 당시의 옥포가 그려지지 않을까 한다.

전반부가 거제도에서의 삶과 지역 경제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전개된다면, 후반부는 정말 배만드는 이야기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왜 해양플랜트가 일반적인 배만드는 것보다 난이도가 높은 것인지, 왜 하청업체의 규모가 정직원들보다 커지게 되었는지, 일감이 줄어 들면서 그들의 삶은 어떠한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 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거제도에서 10여개월 동안에 들었던 내용보다 좀 더 적나라했다.

내려가서 일하기 전까지 그저 주식선물로 매도 포지션 잡기 좋은 종목이었지만, 내려가서 함께 일한 후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일터로 인식되는 그곳,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는 잠시 저 멀리 밀려나 있던 그 기억을 다시 상기시켰다.

by 이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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