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며칠 전 한가로이 Threads의 글들을 보던 중, 얼마 전에 읽었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관련 글이 등장, 댓글에 그런 거 읽지 말고 진짜 쇼펜하우어가 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어 보고 얘기하라는 내용이 있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만 읽어본 나도 창피한 마음에 도서관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 빌려 왔다. 어마어마한 두께와 깨알같은 글을 보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를 시작할 때 이후로 가장 큰 압박감을 느끼며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별 생각없이 을유문화사에서 2015년에 출간한 개정증보판을 선택했고 이미 절판된 책이다. 다양한 버전들이 판매되고 있고 어떤 버전을 선택하든 상관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양 철학을 따로 공부한 적이 없는 독자라면 이들이 사용하는 낯설은 용어에 처음부터 부담이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이런 용어에 대한 각주가 잘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처음에는 이런 용어에 익숙해지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는 다행히 그리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내가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표상을 형이하학적인 것, 의지를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다르게 설명하면 표상은 자연과학으로 밝혀진 것, 의지는 자연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에서 표상에 대해, 2장에서 의지에 대해, 그리고 다시 3장은 표상, 4장은 의지에 관한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표상에 대한 내용은 자연과학에 대한 것이라 그냥 19세기 자연 과학은 이 정도까지 밝혀졌구나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읽어 나갔다. 반면에 의지에 관련된 내용은 좀 신경을 쓰며 읽어야 하는데, 읽다보면 뭐랄까, 스타워즈에서 나오는 "포스"나 중국 무술에서 자주 나오곤 하는 "기"에 대한 설명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반에 용어의 낯설음때문에 좀 힘들게 느껴지긴 했지만 어렵지 않다. 오히려 난해함보다는 지루함이 이 책의 가장 큰 허들이다. 19세기 중반의 지식은 21세기 인류의 입장에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 게다가, 글의 성격이 마치 어떤 문장도 책잡히지 않으려는 듯 일일이 정의하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한 걸 뭐 이리 자세히 설명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물론, 저자는 그렇게 써야만 해서 그렇게 쓴 것이다. 논문 디펜스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독자가 리뷰어의 입장이 아니라 지루한 것일 뿐이다. 1 + 1 = 2 라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과 증명해야 하는 사람과는 입장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분명 시대를 훨신 앞서간 천재임에 틀림이 없다. 과학부터 미술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섭렵했는 지 놀라울 정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의 자연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추측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방법론이 매우 정교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가 그리 폭넓지 못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수준의 친구를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철학에 대한 뚜렷한 한계점도 인식할 수 있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형이상학의 입지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19세기에 형이상학이었던 것이 이제는 형이하학이 되어 버린 것들이 많다. 행복을 위해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라 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 말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부족함을 느낄 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도파민네이션』을 읽어야 하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전에는 철학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이나 환상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은 후에 니체의 책을 읽어 볼까 했는데 읽지 않아도 될 것같다.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