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회화 100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원래 계획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점핑위드러브라는 사진전을 보는 것이었는데, 알고보니 그 사진전은 12월 3일부터였다. 늘상 정보가 늦어서 마감 며칠 앞두고 전시회 찾는 촉박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마감일은 적어 놓았는데, 언제 시작하는 지는 안적어놔서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전격적으로 덕수궁으로 향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보려고 쟁여 두었던 한국근현대화100선을 보기 위해서!

전시회도 그랬지만 덕수궁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적이 없어서 그다지 기대를 안했는데, 낙엽으로 장식된(?) 덕수궁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 매력이 이미 소문이 났는지 꽤나 많은 인파가 들어서서 정취를 느끼고 사진에 담고 있었고, 그 소문은 동아시아 전체에 퍼진 듯 일본인들과 중국인들도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한국 미술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거니와, 한국 미술 전시회를 가본 것은 아마도 약 7년전쯤이었나 리움미술관에서 이중섭 관련 전시회를 본 것이 전부였기에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고, 티켓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 더욱더 기대하면 실망할 거라는 심증을 굳혔다. 이런 생각은 어느 도슨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효하였다.

그림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서 열심히 설명을 들으며 1전시실을 관람하고 있었다. 오지호의 "남향집"은 인상주의 특히 르누아르의 느낌이 살짝, 구본응의 "친구의 초상"은 야수주의, 마티스의 느낌이 살짝 난다는 생각을 하며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훓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도슨트의 설명이 시작된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긴 했지만 그대로 도슨트 설명 또 듣는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니고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도 좀 심심하였기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난 이 도슨트의 설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도슨트의 설명은 절제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뭔가 열정적이면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살짝 건드리는 듯했는데, 그림 하나하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기본, 전반적인 한국 전근대 미술사에 대한 설명은 물론, 전반적인 한국근현대사까지 논하고 있었다. 때론 미시적으로 작품안에서의 붓터치 하나하나를 설명하다가도 갑자기 거시적인 한국근현대사를 논하면서 결코 이때까지 내가 만난 도슨트들 수준에서 나올 수 없는 방대하고도 장엄한 설명으로 관람객들을 이끌어 갔다.

수능시험에 국사가 빠지네 마네 하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국사를 공부하더라도 사실 근대나 현대는 시험범위에 들어가지도 않아 잘 공부하지 않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이기에, 그리고 무겁고 억울하고 비통함과 찌질함이 베어 있는 대한민국의 근대/현대사, 잘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슨트의 설명은 이걸 건드린다. 한국의 미술이 일본에게 영향받을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면 알수록 참 답답하고 침통하고 우울해진다.

가장 뭉클했던 건, 당대 최고의 화백이었던 김은호가 "의기논개"를 그렸는데, 그의 친일 행적은 물론이요 그 그림 자체가 일본색을 띄고 있어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셜명은 그의 제자인 김기창 화백이 현재의 1만원권의 도안을 그렸다는 설명 다음으로 나왔는데, 친일파의 그림이라고 배제한다면, 친일파의 제자가 그린 도안이 대한민국의 화폐에 사용되고 있는 상황은 또 어찌할 것인가라는 논쟁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과연 어디까지가 일제의 잔재이고 어디까지가 우리의 고유 유산인가! 그걸 구분하는 것은 어떤 기준인가, 또 누구의 기준인가!

결국 내가 느꼈던 것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라는 구호는 그저 구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일제의 잔재는 우리 몸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우리의 생활과 역사에 뿌리깊에 섞여 있고, 이는 청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겨져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우리의 과오를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친일을 한 자들의 자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음을 넘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실 또한 우리의 과오이다. "일제의 잔재"는 청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절제된 열정을 모여준 도슨트는 설명을 마치고 큰 박수갈채를 받았고, 난 나머지 설명이 미치지 못한 그림들을 보러 다시 전시회실을 돌았으나 그 설명의 여운이 너무 강하여 그림이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몇 가지 더 언급해 보자면, 배운성의 "가족도"는 등장인물들의 영혼이 빠져 나간 듯 보였고, 워낙 유명한 이중섭의 "황소"는 뭉크의 "절규"같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으며 김환기의 "산월"은 개인적으로 샤갈의 스타일이 느껴졌다.

이상욱